“굿네이버스와 함께 한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인거죠.”
어릴 때부터 사진을 좋아했어요.
어머니가 사진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카메라로 사진을 많이 찍곤 했거든요.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을 업으로 삼는 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저는 색약의 눈을 가지고 있고, 실제 대학에서도 국제통상학을 전공했고요.
근데 어느 샌가 제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살아가고 있더라구요.
2007년의 어느 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서 살아가는 제게
능력을 나눠달라며 굿네이버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저에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익숙한 것이지만,
이 사진을 통해 굶주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기회를 사양할 이유가 없었죠.
그 이후로 굿네이버스와 함께 아프리카 촬영을 진행했어요.
에티오피아, 케냐, 르완다, 탄자니아, 차드..
그리고 비행기를 잘못 내려서 가 본 나라, 한 군데. (웃음)
“2009년 여름, 차드에 다녀왔습니다.”
굿네이버스와 함께, 또 개인적으로도 참 많은 나라를 방문했는데
차드는 ‘어떻게 이렇게 못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나라였어요.
차드는 7월이 겨울인데도 50도를 넘는 날씨이다 보니
하루에 탄산수 6병을 넘게 마셔도 화장실을 안가도 되더라구요. (웃음)
풀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메마르고 갈한 땅,
아프리카 여러 국가를 다녀봤지만 차드가 가장 비참했습니다.
험한 조건, 불안한 정세, 도로도 정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접근성까지 떨어지고..
이렇게 힘든 곳이다 보니 구호단체들도 꺼려서 돕는 손길조차 드물다고 하더라구요.
굿네이버스 차드 지부장님 집에서 생활하면서 돌아본 차드는 정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울기도 너무 많이 울었구요.
전 아이들의 밝은 표정을 참 좋아하는데,
이번엔 그들의 눈물과 아픔을 사진에 담아서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래야 이 아이들을 위로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차드의 상황을 제 눈물과 함께 하나, 하나 카메라에 담아냈습니다.
“유뉴스 이삭을 만나고 우물을 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두와라 딤실로’.
이 마을은 제가 차드에 우물을 파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을 우물 주위로 오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수인성 질병으로 고통 받는다는 사실은.. 잔혹한 말이지만- 당연한 결과인거죠.
마을에 유일하게 있는 작은 병원에는 환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힘들게 수술로 살아난다 해도 ‘만원’하는 링거를 맞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요..
진짜 꼴랑 ‘만원’ 때문에 죽는겁니다. 그 돈이 없어서..
저도 딸이 있어요.
이제 태어난 지 10개월이 되었으니 제가 차드에 있을 때는 백일을 갓 넘긴 갓난아기였는데,
유뉴스를 보는 순간 정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 말 그대로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보며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만 원짜리 영양제를 맞히는 것뿐이라는 게...
팔이 너무 얇아 혈관을 찾을 수 없어서 성인용 긴 주사바늘로 아이에게 시술해야 했어요.
고통스러워하는 아이 얼굴이 평온하게 잠들기 까지 제 아이의 모습이 어찌나 겹쳐보이던지
...정말 숨을 쉬기도 힘들었습니다.
전 그 다음날 차드를 떠났어야 했기 때문에
지부장님께 유뉴스의 분유를 부탁하고 돌아섰습니다.
유뉴스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솔직히 분유를 먹고 건강해졌다는 말을 해드리고 싶고..
저도 그런 해피엔딩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후에 유뉴스는 결국 죽었어요.
이게 그 땅의 현실입니다.
너무 잔인하지만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되는 안타까운 현실이요.
한국에 돌아왔지만 유뉴스의 눈망울, 아픔을 머금은 그 까만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우물을 파야겠다,
죽어가는 그 땅에 한국 사람들이 만든 생명우물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죠.
우물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할게요.